CNC 장치를 처음 국산화 하면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머시닝 센터의 조립이 최종단계에 들어갔다. 
연일 계속된 철야작업으로, 필자는 피로로 온몸이 지쳐 있었다. 세상이 
막 잠에서 깨어날 시각인 새벽 5시반 NC장치의 조정을 거의 끝내고, 
조립공장에서 설계실로 막 돌아왔다. 잠시의 휴식도 취하기 전에 수위실
에서 연락이 왔다.「회장님 (당사 창업자이신 문선명 총재) 께서 서울에
서 창원공장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완성된 국산1호기를 빨리 보고 싶으
신 모양이다. 서울에서 창원까지는 정상적인 비행을 한다 해도, 꽤 시간
이 걸렸겠지만, 준비하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짧게 느껴진 몇 시간 후
였다.

  공장에 도착하신 회장님은 곧바로 기계에 대해서 잘 아시는 사장
님의 안내를 받아 아직 마무리 작업이 끝나지도 않은 머시닝 센터 앞으
로 다가오셨다. 오시자마자 바로 FANUC NC (MODEL 6M)의 전원을 투입, 자
동운전 시범을 보였다. 독특한 ATC기구(한·일특허출원)가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작동 되기 시작하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던 회장님은 사
장에게 말씀하셨다. 「이 기계를 양산해서 세계를 향해 수출하시오」 그
리고 회장님의 관심은 더 세부적이고 핵심적인 NC장치에 있는 것 같았다.  
반도체가 밀집한 NC장치를 보시면서 「이것이 앞으로의 경제발전에 중요
한 역할을 할 것이니 우리 손으로 꼭 개발하시오」 그 한 순간, 그 한마디
가 이후 우리의 운명을 새롭게 창조하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그 때가 
1981년 4월이었다. 


그 해의 9월 서독에서 개최된 유명한 하노바 공작기계 전시회에 출품되었
다. 물론 한국산 NC공작기계로써는 최초의 쾌거였다. 그 때부터 필자와 전
자 팀의 투쟁은 시작되었다. 기계는 얼마 후에 양산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한꺼번에 15대의 머시닝 센터용 강전반을 조립할 수 있는 전자 조
립공장이 만들어 졌다.  외제 NC 역시 수없이 수입되었다. 그리고 회장님
의 말씀 대로 많은 TNV-50이 일본, 미국, 독일 등지로 수출되어 우리는 수
출 산업훈장을 받게 되었다.  우리들의 힘으로 전기설계나 전장 기술은 충
분히 인정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들의 목표는 「국산 CNC의 개발」이
다. 우리들의 이다짐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외제NC를 대체할 수 있는 국산 CNC는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당시의 기술환경을 바라볼 때 마치 사막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과 같
았다. 「언제까지나 우리나라가 NC를 수입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누군가 
국산 CNC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하자.」라는 문성균 당시 
사장의 강한 개발 의지와 지원에 힘을 입어 전자 개발실이 만들어졌고, 인
력과 개발장비가 조금씩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1982년 12월, 국산 CNC
는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은 계속되었다. 요구되는 CNC장치는 
공장자동화의 기초가 되는 기술이기 때문에, 전 산업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Software, Hardware의 기본부터 자사에 축적할 수 있게 한다는 목적아래 개
발방침은 결정되었고, 지금도 우리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1 국산화율 50%이상 
2 부품점수는 일제보다 적게 
3 원가를 설정해서 설계를 시작 (가격은 외제NC 보다 낮게) 
4. 특허를 취득한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한글 NC장치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이다.  

 돌이켜 보면 무모한 모험이었다. 많은 간부들의 수많은 반대가 시작 되었다.  
세계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연구원도 당시에 500명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FANUC사, 세계를 선도하는 일본의 전자산업의 주변기술을 토대로 최첨단 자
동화의 양산공장을 자랑하는 거인. 또한 뭐니 뭐니 해도 우리회사는 지금, 
FANUC사의 대고객이며, 앞으로도 FANUC NC를 수입할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았
다.  그 동안 우리가 국산 NC를 개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대량생산의 외제NC보다 싸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과연 국산 NC를 기계 유저(User)가 사용해줄 
것인가도 생각해볼 문제였다.  비싸게 만들어서 싸게 팔면 경영이 안되고, 
또 싸게 만들어 고장이 많으면 기계 유저는 「그것 봐라! 역시 국산은 안 
된다. 」고 해서 두번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제NC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상대도 안 되는 상대와는 빨리 손을 잡는 것이 좋다는 등으로 이모저모 검
토하고 설명하였지만,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냉정한 반대의 소리뿐, 격려의 말
은 우리 곁에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젊은 연구진의 투지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거인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남이 아닌 우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역사는 언제나 역경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연일 철야
의 연구와 실험이 계속되었다. 
 
 당사의 NC공작기계 도입은 1976년부터 시작했다. 사람의 수작업으로는 불
가능하고 복잡한 3차원가공을 하기 위하여 일본 마끼노 후라이스사의 NC밀
링 수입이 처음 이었다. 고가장비이고 24시간 사용되었으나 고장도 많았다.  
필자는 밤이거나 낮이거나 시간에 관계없이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 
달려가 고장수리에 몰두했다.  1976년 9월에 입사한 필자의 맨 처음 맡았던 
일이었다.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건설중에 있었던 창
원기계공단은 전원사정이 아주 나빴다.  순간정전, 전압변동등이 다반사 일
어났다. 그때마다 NC장치는 고장이 났다.  당시는 FANUC사의 A/S센터도 없
고 보수용 도면도 충분히 없었다.  물론 FAX같은 편리한 것도 없었기 때문
에 할 수 없이 일본 FANUC 사에 장시간의 국제전화를 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NC공작기계는 필요했다. 세계의 생산현장은 NC화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980년 이후의 일본 경제의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일본식 
NC기술개발에 의한 NC공작기계의 대량생산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 위에 예
측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한국에서도 NC공작기계를 만들어야만 된다는 것이
다.  그 때를 대비하여 프로그램 기술, NC수리기술, 전자제어기술을 습득 해
야 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당사 문성균 사장님(당시)의 판단으로 이를 새
로운 기술분야의 정보 수집과 인재확보는 탐욕스러울 정도 였다. 지금 생각
하면 산 꼭대기에 방주를 세운 노아와 같았다.

  얼마 안있어 외제 NC기계가 조금씩 도입되어 생산기술자도 늘어나기 시작
하여 NC프로그램의 프로그래머를 양성해야 했다. 그리고 자사에서도 외제NC
를 장착하여 NC공작기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당시 그 숫자는 50여대를 넘
었다. 차후  국산 NC 「TEPS」가 나오면서 그 숫자는 더욱더 늘어나 총300
대에 이르게 되었다.  오랜 NC공작기계의 유저(User) 인 당사에는 작업자와 
보수기술자, 프로그래머 그리고 NC장치를 기계에 적용하는 전기설계자의 요
구사항을 속속 흡수하는 것이 용이하였다. 이 환경을 잘 이용하면 외제NC를 
사용하지 않아도 한국형 NC를 만들 수 있지 않는가? 국내 유저에 맞는, 사
용하기 쉬운 한국형 NC가 필요하다. 또, 외제NC보다 부품점수를 줄이고 구
성과 배선이 간단하고 무엇보다도 가격을 싸게 할 수 있는 「기술」만이 NC
공작기계의 대중화를 가속화하여 앞으로 한국 산업현장의 생산성 향상을 강
력하게 추진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었다.  

 먼저 기본기술을 확립하기 위해서 0.001mm제어 의 1축 NC설계가 시작되었
다. CPU는 8bit를 선택했다. 성능적으로는 물론 16bit로 하는 것이 좋지만 
국산 CPU를 채택 하는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는 
것은 G사의 8bit CPU 밖에 없었다.  Memory IC도 S사의 것을 채택했다.  부
품점수를 줄여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 외제NC가 Hardware로 실현하고 있
는 회로를 우리는 Software로 실현할 수 있도록 설계의 기본방향을 설정했다.
  
 기능과 신뢰성과 원가의 상반된 요구를 만족하기 위한 기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당사 창업자이신 문선명 총재님의 창업이념인 「통일
원리」가 있다.  필자는 이 중에서 「창조원리」를 공업기술분야에 응용하기 
위하여 다년간 연구해 온 결과 필자는 「통일설계사상」이라는 자신 나름의 
설계사상을 정립하여 이후의 모든 개발,설계에는 이것을 적용, 국산CNC개발
에 있어서의 각종 난제해결에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983년 3월, 회로설계와 기본 SOFT사양이 완성 됐다.  다음은 PCB(인쇄회
로)기판 설계 이다. 요즘에는 PCB기판을 손쉽게 설계할 수 있는 디자인용 
컴퓨터장비인「CAD」라는 것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수작업으
로 Artwork라는 인쇄기판을 위한 「Nega필름」을 만드는데 청색과 적색의 
테이프를 붙이는 것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도 경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데서 하는 것을 보고 응용했
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Artwork대는 형광등과 유리로 만드는등 그
야말로 우리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간신히 만들어진 2배 사
이즈의 Artwork을 PCB기판 메이커에 외주처리 한 후 처음으로 1축 CNC기판
이 만들어졌다. 곧바로 전자부품을 부착해서 조립은 물론 설계자가 직접 수
작업으로 납땜을 했다.  조립이 끝난 Hardware에 Software를 넣고 철야의 
Debug (오류수정작업)이 계속됐다. 연내 완성이라는 목표도 있었지만 무엇보
다도 기술자들의 정열이 하나로 묶어진 것이 개발속도 가속화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땀과 정열의 결과,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우리 
NC를 이제 드디어 기계에 부착해서 가공 물을 절삭하는 모습을 보는 날이 
왔다. 하루라도 빨리 이 눈으로 한국 최초의 NC가 쇠를 깎는 것을 보고 싶
었다.  어느 기계에 부착할까 하고 공장안을 돌아 다니면서 찾아 봤더니 국
산 1호기로서 서독 하노바 쇼에 출품 하여 그 역할을 다해낸 그 역사적인 
머시닝 센터가 보존되어 있었다.  즉시 FANUC 6M NC를 떼어 내고 국산 1호기 
CNC로 교체했다. 

 오후 9시 머시닝 센터 조립공장은 작업자들이 이미 퇴근하여 아무도 없었
다. 어둑어둑한 조립공장의 양산 머시닝 센터 라인의 구석에서 단 하나의 전
등만을 밝힌 채 개발담당자들이 전원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가공개시 버
턴이 눌러졌다. 
 조용하고 넓은 공장 속에 힘차게 밀링캇터가 칩을 밀어 내면서 작동되었다.
 누구로부터 인지 「됐다! 성공이다!」라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절삭이송
속도, 가공면, 위치정도 다 양호했다.  국산1호기 세계최초 한글CNC 「TEPS」
의 탄생. 그 때가 바로 1984년 12월 14일 밤이었다.  


 다음해 1985년 4월「TEPS」는 서울에서 개최된 금형전시회에 당사 NC밀링
「TNMV-2」에 장착되어 처음으로 선보여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때 당
사에서 NC Program 작성장치「TAPT」와 DC SERVO DRIVE「TASU」또한 국내최
초로 개발되어 함께 전시됐다.
 그리고 12월5일 오랜 심사 끝에 과학기술처로부터 "국내최초의 CNC상품화
모델「TEPS」를 개발한 것" 이 공식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이어서 1996년 
1월부터「TEPS」양산이 시작되어 11월에는 CNC장치와 볼스크류 첫 국산화 
성공으로 CNC선반「TNL-53」은 우수국산기계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국산1호기「TEPS」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TEPS」는 국내 
굴지의 기업 포항제철 뿐 아니라 종업원도 없이 사장 혼자서 운영하는 영세
업체에 이르기까지 대량 출하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에도 20여대가 당사 
NC선반, 머시닝센터에 장착되어 납품되었다. 거의가 엔진가공 라인이었다. 
현대자동차는 국산 CNC의 도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알다시피 자동차부품의 
가공기계는 고장이 적어야 하고 만약 고장이 나도 3시간이내에 수리 복구가 
되지 않으면 공장 전체의 생산성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수입 NC장치의 
자체 수리는 거의 불가능 상태였다. 그래서 국산 NC의 등장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현대자동차 장비보전부의 기술자에 대한 TEPS의 보수교육이 
철저히 실시되었다.

  그런데 1987년 3월 어느날 갑자기 현대자동차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당사 
연구소장(상무)과 TEPS개발 책임자에게 곧바로 울산공장으로 와 달라는 것이
다. 그 연락을 받고 바로 연구소장과 필자는 창원에서 울산으로 떠났다. 울
산공장에 도착 하자마자 안내를 받은 곳은 엔진 공작사업부의 책임자인 한 
상무님의 방이었다.
 이미 가공라인의 생산기술부, 장비보전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무거운 분위
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제목은 「TEPS장비의 고장다발과 근
본대책」이었다. 클레임 내용은 몇일전 부터 듣고 있어서 그런대로 대응은 
하고 있었으나 24시간 가공라인이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한 상태였다. 원인불
명의 오동작으로 가공불량이 속출하고, 때로는 NC선반의 터렛 (Turret)이 
가공물과 충돌하는 사고도 일어나 작업자들은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하였
다. 관계자의 보고가 끝나고 나서 한상무님이 당사 연구소장에게 하신 질문
은 간단했다.

「TEPS 20대를 외제NC로 바꾸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며 비용이 얼마나 드는
가?」 TEPS를 고쳐서 쓴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대답하
면 좋을지 당황하신 연구소장 대신에 TEPS개발 책임자인 필자는 「노이즈
(Noise)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대책을 라인의 기계에 적용하면 TEPS
라도 충분히 쓸 수 있다.」고 변명했으나 3000명 엔진 가공라인 책임자의 귀
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상무님은 더욱 더 냉정하게 말했다. 「외제장비에도 
좋은 것도 있지만 고장이 많은 것도 있다. 외제든 국산이든 고장이 적은 장
비가 아니면 자동차 공장에서는 사용할 수 가 없다. 더 말하자면 TEPS가 현
대자동차 공장에서 못 쓴다면 아마도 한국시장에서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
다.」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우리로서는 여기서 TEPS를 외제NC로 바꾸면 
국산 CNC사업도 이제 끝이다.

 여기서 어떻게 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끝에 필자는 필사의 각
오로 국산CNC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품질에는 책임을 지고 해결 할 수 있
으니까 한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만일 안되면 무상으로 외제NC와 바꿔 드리
겠습니다. 」 하고 약속을 했다.

 그후 악몽과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어쨌든 개발실에서 생각만 한다고 해
서 되는 일이 아니다.현대자동차에 있는 한대 한대의 기계에서 오동작이 일
어나는 것만을 하루종일 기다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전자 문제에서는 정확한 
원인을 찾아 내는 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언제 일어 날지도 모르는 오동작
의 순간을 잡아서 원인을 찾아 내는 데에는 많은 사람과 시간이 소요됐다. 
개발요원을 총동원해서 겨우 노이즈의 원인과 대책이 수립됐다. 나머지는 이 
대책을 전장비에 철저히 적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약속의 한달이 지났다. 오동작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후 1년정도 지나서 한국기계연구소(KIMM)의 어떤 부장이 당사를 방문했을 
때 필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부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몇일전에 
현대자동차의 한상무님과 만났을 때 마침 TEPS 이야기가 나왔는데, TEPS는 
지금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어려웠
던 현대자동차의 문제도 극복하였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개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겨우 반을 이룬 셈이다. 국산 CNC사업의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왜냐하면 개발보다 어려운 것은 신뢰성의 확보이기 때문이
다. 개발시의 시험이나 제조시의 검사에 합격해도 그것이 출하되어서 고객 
공장의 열악한 환경속에서 언제까지 고장 없이 움직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개발 직후에 만들어진 이들 장비, 언제 고장날지도 모르는 국산 CNC를 써 
주는 손님은 없다. 시험삼아 만든 기계에 돈내는 손님도 없다. 생산재인 
공작기계의 고장은 공장이나 중소기업에 치명적인 문제이다. 열변을 토해서 
문제없다고 손님을 설득해도 「국산」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는 쉽게 바꿔
지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일제 CNC의 고장율은 0.02% 즉, 제품 1대가 50개월(약 4년)에 1번 고장난다
는 계산이 된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100대가 한달동안 가동하는데 2대만 
고장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험실에 있는 1대의 NC장치가 4년후에 처음
으로 고장이 나도 일제와 같은 신뢰성을 갖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연
히 그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성을 검증 하기 위해
서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제품을 되도록이면 길게 가동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는 것이다. 개발해서 200∼300대 이상 가동하면 2∼3년후에야 비로소 국산 
CNC장치의 고장율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CNC장치 뿐만 아니고 그것을 
구성하는 전자부품도 마찬가지다. 국산화율을 높이고 비용(Cost)을 낮추기 
위해서는 국산부품을 많이 쓰게 된다. 

 지금 예를 들어서 3만원의 어떤 수입품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2만원
의 국산부품으로 바꿔도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적용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만약 신뢰성 기술이 없다면 1만원의 경비를 소비해도 출하 1년후에 수백대
의 기계가 고장을 연발하고 수리경비가 1대당 수10만원이 되어 이들을 합치
면 수천만원의 경비가 날아갈 뿐만 아니라 국산 CNC와 기계, 나아가서 회사
의 신용까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 실제 얼마든지 있는 일
이다.


  TEPS의 수난이 시작됐다. 1988년에서 1989년까지 많은 품질문제를 발생
시켰다. 국산 CNC의 개척자인 TEPS도 역시 이 품질문제를 하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여야 할 과정이었다. 속출하는 클레임에 A/S기술자의 양성이 따라가
지 못했다. NC의 고장을 없애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공작기계의 매출이 떨어져 버린다. 속출하는 클레임에 위기감을 느낀 기계
영업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TEPS의 생산을 중단해 달라는 요구이다.

 1990년 1월초 모두에게 희망이 가득한 새해가 시작되는 시기에 사장님으
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입사이래 최대의 야단을 맞았다. 「사람도 사업도 
똑 같다. 특별한 보호를 해줘서 잘 된 일이 없다. 지금까지 개발을 위해 많
은 보호를 해 왔으나, 이제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 TEPS의 품질안
정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일절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라. NC사
업을 계속할지 안할지는 차후에 결정한다.」필자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과 마찬가지였다. 사태의 중대성과 책임을 실감했다. 필자는 사장님께 깊이 
사죄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참으로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비서실 여직원이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남자가 울면서 사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처
음 봤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이후 필자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리하기 위해 3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어쨌든 품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신뢰성을 올리는 길 밖에 없다.」 
그렇게 결심을 한 필자는 40명이었던 개발팀을 모두 해산시키고 전원 신뢰
성 연구에 투입 시켰다. 품질과 신뢰성의 기본은 설계 및 개발 단계에서 결
정되기 때문이다.

 또,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 이지만 NC의 새로운 기능추가나 개선등이 속속 
생겨나는 개발업무를 소화해 나가는 데에는 40명이란 개발 인원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저(User)들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신뢰성 문제
의 근본 원인을 해명하는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개발업무에서 해방된 40명은 몇 팀으로 나누어
져 설계기준의 점검, 부품의 신뢰성시험, 조립제품의 신뢰성시험, 제조검사 
기준의 점검, 출하된 모든 기계의 Claim Data를 전산처리 할 수 있는 A/S 
Data Base제작 등, 평소 잘하지 못했던 항목을 철저히 연구했다. 때마침 이
전에 발주해 놓았던 Noise Tester등 고급 Test장비나 분석 장비가 도입되고 
또, 일부 특수한 기능을 검사하는데 기존장비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자체적
으로 개발하기도 하여 본격적인 신뢰성 규명에 많은 도움을 줬다. 물론 필자
도 일선에서 직접 유저를 몇번이나 순회하면서 한대 한대 문제 기계의 원
인을 규명하고 개선을 했다. 


 1990년 2월 창원 공장을 방문하신 문선명 회장님(당시)은 「문제가 있으리
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상했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
해서라도 해결하도록 노력해야지, NC사업은 절대 포기하면 안된다.」고 경
영진을 격려해 주셨다. 그 동안 많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많은 
개선이 이루어져, TEPS의 고장율도 금새 좋아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선된 TEPS는 「가공속도의 고속화」라는 성능향상의 효과까
지 볼 수 있게 되었다. 1년 지나서 설계, 제조, A/S에 많은 노-하우를 얻어 
냈다. 「비온 뒤에 땅은 굳는다. 」는 말이 실감나는 시간들이었다.

 이 해 우리를 기쁘게 했던 또 하나의 일은 당사가 출원했던 CNC 관령특허를 
국내최초로 획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에도 출원됐다.
 1991년 1월, NC 개발업무는 기적적으로 재개되었다. 신뢰성 연구의 성과는 
그대로 다음 모델 개발에 활용되어 고신뢰성 CNC 「SENTROL」로 다시 태어났
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한 것이다.

 "SENTROL"의 신뢰성 Test는 1차, 2차, 3차에 거쳐 실시됐다. 결과는 양호했
다. 특히 노이즈에 대해서는 매우 강했다.